난폭한 여제의 귀환

지난 2013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부 최고 화두는 ‘왕멍의 귀환’이었다. 왕멍이 누군가? 올림픽 금메달 4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하고, 세계 선수권을 2연패 한 여자부의 절대 강자이지만 사사건건 사고를 쳐 중국 내에서조차 고개를 내젓는 뜨거운 감자인 선수이다. 경기 내내 지저분한 파울을 일삼는 것은 물론이고 성적이 불만족스러우면, 그러니까 자기가 1등을 못하면 시상식 내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는 왕멍은 세계 최고의 비매너 선수이자 비호감 선수로, 중국 자국에서도 밴쿠버 올림픽 이후 훈련 기간 중 술 마시고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린다든지, 코칭 스태프에 반발하고 폭행한다든지 등의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켜 급기야는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왕멍이 국제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 여자 쇼트트랙의 판도는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 속에서 대한민국이 우세를 점하는 상황으로 흘러갔고 이에 중국 체육 당국은 소치 올림픽을 앞두고 2012년 왕멍의 자격 정지를 해제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돌아온 왕멍은 월드컵대회 500m에서 연속 우승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난폭한 여왕 왕멍의 귀환으로 대한민국과 중국의 맞대결은 다시 불붙었고 2013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는 소치 올림픽의 전초전으로 주목을 받았다.


세계선수권 우승을 반칙으로 강탈당한 박승희

세계선수권이 개막하기 전에는 쇼트트랙 신구 여왕인 왕멍과 심석희의 대결 구도로 예상되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심석희가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부진했던 반면, 2010년 왕멍의 세계 선수권 3연패를 저지한 바 있는 박승희가 저력을 발휘하며 왕멍과 경쟁했다.

3년 전 비록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동메달 두 개를 따내는 데 그쳤지만 세계선수권을 우승하며 왕멍의 3연패를 막아낸 박승희에게 왕멍은 시상식에서 시종일관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챔피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맞붙은 세계선수권에서도 왕멍은 박승희가 예상외로 선전하며 자신의 종합우승을 또다시 막아설 듯하자 고의로 반칙을 범해 세계선수권 우승을 강탈해 갔다. 중국 언론에서는 4관왕의 탄생이니, 대한민국의 강세 종목인 1,000m에서 우승이니 하며 왕멍의 더티 플레이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만 명명백백히 왕멍은 고의 반칙으로 우승한 역대 최악의 세계챔피언이었다.


선발전 2위로 남자친구, 동생과 동반 올림픽 행

더러운 반칙에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과 올림픽 개인전 직행 티켓을 놓쳤으니 억울할 만도 했지만 박승희는 의연했다. 한 달 후에 벌어진 국가선발전에서 종합 2위를 차지하며 소치 올림픽 개인전 출전 자격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2012 선발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대표팀에서 탈락했던 동생 박세영과 남자친구 이한빈까지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어 기쁨이 세 배가 됐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사상 두 번째(첫 번째는 양궁의 기보배, 오진혁 커플)로 커플 금메달리스트가 됨은 물론이고, 최초의 남매 금메달리스트가 될 가능성까지 생긴 것이다.


반쪽 선수 왕멍과는 다른 전천후 선수

이렇게 올림픽 개인전에 출전하게 된 박승희의 가장 큰 적은 역시나 왕멍이다. 지난 세계선수권에서의 억지 우승은 차지하더라도 그간 숱한 대회에서 승패를 주고받으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 온 두 선수지만 단거리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왕멍과 달리 박승희는 500m부터 3,000m까지 모두 세계 정상권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지난 세계선수권에서도 500m는 왕멍에 이어  2위에 오르고, 1,500m는 1위를 차지했으며, 왕멍의 반칙이 없었으면 3,000m도 1등 내지 2등은 차지했을 것이다. 모든 종목을 고루 잘해야 하는 세계선수권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면 박승희가 왕멍을 이기는 게 당연한 일이다.

 

왕멍의 다관왕과 기록 수립을 막아라!

하지만 1년에 1번 하는 세계선수권과 4년에 1번 하는 올림픽의 비중이 같을 수는 없는 법. 지난 2010년 올림픽과 2013 세계선수권의 복수를 겸해 정정당당하게 왕멍을 이기고 못 이룬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뤄야만 하는 박승희다. 

더욱이 왕멍은 소치 올림픽에서 다양한 기록에 도전하기에 세계 최강 대한민국 쇼트트랙 자존심을 걸고서도 저지해야만 한다.

우선 왕멍은 지금까지 총 네 개의 금메달을 땄는데, 이는 전이경과 같은 기록이다. 또한 500m 3연패에도 나서는데 이 또한 김기훈, 전이경의 1,000m 2연패를 경신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왕멍을 500m에서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흔히들 피겨 여자 싱글의 김연아가 여자 선수들과 경쟁하는 것은 반칙이며 남자 선수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는데, 여자 500m에서의 왕멍이 그렇다. 독보적인 스타트와 순간 스피드를 갖춘 왕멍을 500m에서 꺽을 선수는 지구상에 남자 선수들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박승희는 지난 세계선수권에서 왕멍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물론 왕멍의 절대 우세가 예상되지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은 곳이 빙판이기에 결승까지만 오른다면 적어도 메달은 기대해 볼만 하다.

그리고 나머지 종목들 중 1,500m는 밴쿠버 2관왕인 저우양이 3년 전 기량을 되찾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의 절대 우세가 예상되고 1,000m와 여자 계주에서는 두 선수를 중심으로 대한민국과 중국 대표팀이 치열한 혈전을 벌일 것으로 보이는데 박승희뿐만 아니라 개인전에 나서는 심석희, 김아랑, 릴레이 주자인 공상정, 조해리의 선전 여부가 메달 색깔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승부가 될지 모르는 소치, 승자는…….

지금은 실업팀이 많이 생겨 20대 후반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선수가 많이 늘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 졸업 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1992년 생으로 내년이면 만 21살이 되는 박승희지만 현 추세와 달리 잦은 부상과 고된 선수 생활에 지쳐서 소치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을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85년생인 왕멍 또한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지 알 수 없는 나이. 두 사람의 대결은 2013-2014 시즌이 마지막일 수 있다. 그렇기에 2014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부 경기는 편파 판정과 더러운 파울 없이 정정당당하게 치러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만약 이번 올림픽에서도 승리의 여신이 지저분한 파울과 트러블만 일으키는 왕멍의 손을 들어준다 해도 남자친구, 동생과 함께 온갖 난관을 헤치고 성실히 선수 생활을 계속해 온 박승희가 종국에는 인생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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